01. 동기 |
내가 안영을 처음으로 안 것은 열국지에서 제나라편을 읽으면서 였다. 그 후에 안자가 어떤 인물인지 너무나 궁금하여 일본사람이 쓴 안자라는 3권으로 된 책을 보았다.그 후 사기열전이나 인터넷으로 이것 저것 조사를 해보았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안영은 정말 그의 행보 하나 하나가 그 무게감과 대단함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안영에게 대단하게 생각한 이유는 안영이 있던 시대의 제나라는 혼란 그 자체였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에 격었던 혼란은 제나라 시대에 비하면 정말 세발의 피라는 생각이들 정도다. 그의 시대는 수도가 적에 의해서 침탈당했고 왕이 살해당다고 주변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가 엉망이었고 내부적으로 아첨하는 무리가 정권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였다.
02. 등장 |
안영은 안영의 키는 ‘여섯 자(尺)가 되지 않는다’ 않아 아버지는 아들을 장군으로 만들려는 꿈을 접어야 했다. (지금 키로 약 140cm 정도를 의미함) 그래서 제나라 왕의 신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유명한 사자성어를 만들어 내는데...
처음으로 섬긴 군주인 제 영공 때, 도성의 여성 사이에 남장 풍습이 유행하여, 영공은 이를 중지시키라는 금령을 몇 번이나 내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법이 엄해질수록 더욱 따르지 않고 악화되어갔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대신들의 논의를 하고 있을때
영공의 근처에 있던 안영이 ‘군께서 하고 계신 것은 소의 머리를 간판에 걸고 말 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우두마육(牛頭馬肉)
그것은 궁안에 있는 비빈들이 남장을 하고 법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궁정 안에서부터 금한다면 유행은 곧 사그라들겁니다.’라고 간언을 하였습니다.
그 후 6개월이 지나서 이 남장하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두마육(牛頭馬肉) 말이 후에 변화하여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성어로 알려집니다.
羊頭狗肉 (양두구육)
羊 양 양
頭 머리 두
狗 개 구
肉 고기 육, 둘레 유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 속뜻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03. 맞수 최저와 싸움 |
20대에 이미 제나라의 위험 인물로 인식되어 다른나라로 망명한 인물 최저는 역사상 최고의 간신이라고 할 만하다. 왕을 살해하고 온갖 부정을 하고도 살아남은 인물이다.
이 시대 안영과 완전히 대조대는 인물이었다.
제나라 장공은 당시 재상 최저(崔杼)의 미모의 처와 밀통하고 있었는데, 이에 최저는 격노하여 기원전 548년 5월, 자신의 집에 장공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 시해하였다.
이를 들은 안영은 급히 도성으로 달려왔다. 만약 장공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최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요, 그렇다고 최저의 편을 들면 불충한 신하라는 악명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었다.
이에 대해 안영은 ‘나 혼자만의 군주가 아니니 따라죽지 않을 것이오. 내게 죄가 없으니 도망가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군주가 죽었으니 그냥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고 말하고, 최저의 집에 들어가 형식대로 정중히 곡례를 마치고 돌아갔다.
최저는 경봉(慶封)과 함께 장공의 이복동생 공자 저구(杵臼, 제 경공(景公))를 군주로 옹립하고, 반대파를 억누르기 위하여 모든 신하를 제나라의 시조 태공(太公)을 모신 사당에 모아놓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들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
맹세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였다.
모두들 안영이 어떠한 자세를 취할지 긴장하며 바로보고 있었는데 안영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군주와 공실을 편들지 않고, 최씨와 경씨의 편을 드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맹세하였다.
그때 최저는 안영을 죽이고 싶었으나 안영의 명성이 무서워해서 함부로 하지 못했다.
대신 최저는 안영의 인심을 얻고 싶어서 "이번만 특별히 살려준다고 했다." 라고 했다.
그리고 안영에게 나에게 고맙다고 해야하지 않는냐고 했을때,
안영은‘큰 불인을 저질러놓고 작은 인을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라고 말하고 유유히 돌아갔다
최저의 집안은 기원전 546년에 후계자 분쟁이 발생하여 경봉에 의해서 이에 개입한 경봉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후 경봉의 경씨 집안 역시 멸망하게 된다.
04. 초나라 사신 |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초 영왕(靈王)은 키가 작은 안영을 업신여겨 창피를 주고자, 사람이 통과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옆에 개 정도나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을 만들어놓고 안영에게 이를 지나가게 하였다.
이에 대해 안영은 ‘개 나라에 사신으로 간 자는 개 문으로 들어갑니다. 신은 지금 초나라에 신으로 왔으니, 이러한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이를 들은 영왕은 어쩔 수 없이 대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영왕은 이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안영을 알현하는 자리에 제나라 출신의 도둑을 불러 와 ‘제나라 사람은 이리도 훔치는 일을 좋아하는가?’라 말하여 창피를 주었다. 안영은 이에 대해 ‘귤은 회수 이남에서는 귤(橘)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枳)가 됩니다. 이는 토지와 풍토의 차이입니다. 제나라에서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던 자가 초나라에 와서는 도둑질을 하였으니, 초나라의 풍토는 사람들에게 도둑질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라고 되받아쳤다. 여기서 남귤북지(南橘北枳),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이 말에는 영왕도 할말이 없어 크게 웃으며 ‘성인과 더불어서는 장난치는 게 아니라더니, 그 말대로군. 역으로 과인이 창피를 당했구나.’라고 안영을 인정했다고 한다.
05. 평가 |
공자가 안영을 칭찬
“훌륭하도다. 술잔과 도마 사이를 벗어나지 않고 천리 밖을 알았으니, 이는 안자를 두고 말한 것인데, 가히 적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善哉. 夫不出樽俎之間, 而知千里之外, 晏子之謂也. 可謂折衝矣)
공자는 안영에 의해서 제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길을 막혀 버렸어 대부분의 책에서 안영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 않으나...그런 공자 조차도 안영에 능력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네용^^
사마천 《사기》
안자가 제 장공이 역신에게 시해당했을 때 그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예를 마치고 그대로 돌아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곧 무용(無勇)’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간언의 말을 올릴 때는 그 군주의 안색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進思盡忠退思補過)’는 것인가. 가령 안자가 오늘날 살아있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그 일은 내가 기뻐하고 흠모하는 바가 될 것이다.
06. 생각하기 |
안영을 보면서 느낀점은 역사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너무나 어리썩어서 이미 역사에서 한 실수를 반복해서 한다는 점이죠.
많은 사람들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 중 한명으로 뽑히는 인물로 안영에 대해서 읽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개를 했습니다.
참고
사기열전
안자
http://ko.wikipedia.org/wiki/%EC%95%88%EC%98%.96.91.EB.91.90.EA.B5.AC.EC.9C.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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